가수 심수봉이 10,26사건에 휘말려 온갖 고난의 연속된 인생을 살게 된다.
첫번째 결혼은 심령철학자와 결혼하였지만 그 사람은 아내와 아이도 있었던 남자.
동거생활을 정리하고 아기를 데리고 밤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게 된것.
이 때 심수봉을 도와준 남자는 업소 사장이었다고 하고
이 남자와 결혼을 하여 살았으나
이 남자 역시 본처가 있는 사람이었던 같다.
한달에 2, 3번 집에 들리는 그런 결혼생활을 이어갔으나 이혼하고
라디오 DJ를 맡게 되었고 방송국 PD를 알게되어 심수봉이 PD를 사랑하게 되어
심수봉의 청혼에 의해 결혼하게 되었는데 이 "비나리"라는 노래는 심수봉이직접
작곡하여 CD로 만들어 PD에게 들려준 노래라고 합니다.
물론 이 사람과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비나리/심수봉]
큐피트 화살이 가슴을 뚫고
사랑이 시작된 날
또 다시 운명의 페이지는 넘어가네
나 당신 사랑해도 될까요
말도 못하고 한없이 애타는 나의 눈짓들
세상이 온통 그대 하나로 변해 버렸어
우리 사랑 연습도 없이
벌써 무대로 올려졌네
생각하면 덧없는 꿈일지도 몰라
꿈일지도 몰라
하늘이여, 저 사람 언제 또 갈라놓을거요
하늘이여, 간절한 이 소망 또 외면할거요
예기치 못했던 운명의 그 시간
당신을 만나던 날
드러난 내 상처 어느새 싸매졌네
나만을 사랑하면 안될까요
마음만 달아 올라
오늘도 애타는 나의 몸짓들
따사로운 그대 눈빛따라 도는 해바라기처럼
사랑이란 작은 배 하나
이미 바다로 띄워졌네
생각하면 허무한 꿈일지도 몰라
꿈일지도 몰라
하늘이여, 이 사람 다시 또 눈물이면 안돼요
하늘이여, 저 사람 영원히 사랑하게 해줘요
아, 사랑하게 해줘요~
꿈일지도 몰라
하늘이여, 이 사람 다시 또 눈물이면 안돼요
하늘이여, 저 사람 영원히 사랑하게 해줘요
아, 사랑하게 해줘요~
심수봉 (심민경) 가수
출생 1955년 7월 11일, 충남 서산시 | 양띠, 게자리
가족 아들 한승현
데뷔 1978년 제2회 MBC 대학가요제
소속 라이트웨이브
학력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외 1건
심수봉의 이야기는 사실 처음으로 밝힌 일들이 아니었기에 새로움은 없었습니다.
남편을 짝사랑했던 마음을 담은 '비나리'에 얽힌 이야기도, 궁정동
그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일로 심령학자였던 첫남편이 고문받는 것을 옆방에서
들었다는 이야기도, 이미 방송에서 말했던 일이었기에, 놀랄만한 회상은 아니었습니다.
약 10년전쯤에 발간된 것으로 기억하는데, 승승장구에서 밝힌 내용들은
심수봉의 자서전 '사랑밖에 난 몰라'에 대부분 기술된 내용들이었습니다.
연예인들의 자서전을 사는 일이 좀처럼 없는데도, 비슷한 시기로 기억되는데
조수미의 자서전과 심수봉의 자서전을 사서 읽었습니다
. 장르는 달라도 마음을 움직이는 목소리를 가진 두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했거든요.
한국에 있는 서재에 아직도 있을텐데, 가져오지 못한게 좀 아쉽군요.
솔직히 심수봉의 자서전의 경우는 좀 특별한 마음으로 읽었었습니다.
솔직히 호기심도 있었고, 10.26사태 현장에 있었던 당사자라,
개인적으로는 현대사 자료라는 생각으로 사서 읽었는데, 꽤 오래전에 읽었음에도
책을 덮고 하나의 감정이 길게 여운으로 남았던 것같습니다.
'사랑을 노래하는 절대감성의 심수봉이 이젠 여자로서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방송에서도 영이 맑다는 표현을 했지만, 자서전을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던 듯합니다. '이 사람은 너무 순수해서 세상에 더 휘둘리고
사는구나, 너무 순수하고 감성적인 사람이라,사람들의 속물근성에 치이고 살았구나',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10.26사태 궁정동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도 한국이 아니었더라면,
돈방석에 앉았을 수도 있었을 일입니다. 미국이나 외국에서의 일이었다면,
아마 유명언론에서 거액을 지불하고 사고도 남을 일이었겠지만,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죠. 독재정권, 폭력정권이기에 가능했던 아이러니죠.
대통령과의 섹스스캔들을 파는 일도 있는데 말이죠.
박정희에 이어 전두환 군부정권이 들어서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심수봉의 인생도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비정상적으로 정권을 인수한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정권의 계승자여야 했기에,
박정희의 치부가 세상에 드러나기를 두려워했죠.
더구나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하극상의 현장이었으니,
군인들에게 하극상이란 최악의 치부라 여겨졌을 법도 합니다.
심수봉은 아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가계가 예인의 집안입니다.
할아버지는 판소리 명창이자 가야금 명인 심정순, 아버지 심재덕은 민요채집가,
작은 아버지와 고모는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분들입니다.
특히 심수봉의 고모 故심화영님은 승무 무형문화재이기도 했습니다.
딱 한 번 공연을 본적이 있었는데, 당시는 심수봉의 고모라는 것은 몰랐었습니다만...
심수봉의 노래에는 한의 정서와 반음이 많다는 특징이 있는데,
소리꾼이 많은 그녀의 집안내력과 무관해 보이지 않은 듯도 하고요.
전문가의 소견은 아니지만 10.26사태 하면 굵직한 단어들이 떠오르죠.
故박정희대통령, 김재규, 차지철, 궁정동, 삽교천, 그때 그사람 심수봉,
그리고 또 한 여인 신모씨.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마셨다는 술로 더 유명해져 버린
시바스 리갈입니다.
역사는 세월과 함께 묻혀가고 비극의 한 현장으로 기억될 뿐이지만,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심수봉에게는 여전히 아픔이고, 상처였습니다.
요즘 드라마로 방영되고 있는 빛과 그림자에도 궁정동 사건이 나왔는데,
궁정동이라는 말만 듣고 시댁에서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지 좌불안석이었다는 고백만으로도,
그녀에게 30여전의 그 일은 여전히 살아있는
아픔으로 자리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자의건 타의건 심수봉은 그 자리에 있었고,
오랜 시간이 흘러 마지막 말을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책에서 읽었던 기억으로는 총소리에 놀라 곁으로 가니
"난 괜찮다"라는 말을 했다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마지막까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초연했다는 말도 덧붙였던 것같고요.
그 사건이후 그녀의 삶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의 연속이었으니,
더더욱이나 잊혀질 수 없는 사건이겠지요.
자신과 만난다는 이유로 서빙고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던 첫남편,
거짓 각서를 쓰고 풀려나고는 곧바로 정신병원에 강제감금되어,
약물중독에 이를 정도로 주사를 맞았다는 고백은,
한 개인의 삶과 인권을 철저히 유린한 폭력이었습니다.
한 사람을 정신병자로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었던 세상,
그 세상을 이렇게 방송에서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심수봉이 광주에서 끝내 부르지 못하고 왔다는 백만송이 장미,
5.18 광주민주화항쟁에서 이슬처럼 사라져 버린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한 노래였다고
밝힐 수 있음 또한 그러하고 말이지요.
특히 무궁화는 그녀의 아들에게 유언처럼 남겨주고 싶었던 노랫말이었다는 고백을
예전에 다른 방송에서 들었지만, 각하의 심기를 거슬렸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어야 했던 곡절까지 있는 노래지요.
요즘은 청소년들의 정서에 해악을 미친다는 이유, 혹은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금지곡 사유가 되는 일이 더러있지만,
서슬퍼런 군부독재 아래서는 영부인의 이름자를 쓰면 영화든 노래든, 과거의 것들까지
다 금지조치를 당했고, 우울한 정서를 반영한다는 이유만으로도 금지곡이 되는 일도 있었죠.
조용필의 촛불도 금지된 일이 있었습니다.
촛불이 꺼지는 것이 사회의 우울함을 조장한다나 뭐라나,
암튼 그런 이유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심수봉의 노래는 그 떨리는 음색만으로도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는 마법이 있는데요,
가사말이 시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뛰어나게 문학적이지도 않은데,
가슴을 파고들어 감정 밑바닥을 헤집어 주는 마력이 있습니다.
직설적이리만큼 담백한 가사가 심수봉의 목소리로 옷을 입으면, 처연하리만큼
진한 감정의 노래로 탈바꿈되어 버리지요. 탁재훈과 이수근을 현장에서 울려버리는 마력,
그것은 심수봉이 말했듯이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그 상처와 만나게 하기 때문일 겁니다.
남일 말하듯 너무나 담담하게 "인생이 슬퍼요"라고 말하는데,
사람이 너무 힘든 일을 당하고 나면, 감정도 슬픔도 남의 감정처럼
그렇게 읊조리듯 뱉을 수 있는 처연함을 느끼게 합니다.
초연함이 아닌 처연함말이에요.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의 현장에 있어야 했던
심수봉, 그런 것들이 지나고 나니 필연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고백은,
긴 세월을 통해 생겨난 내성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한 순간 방송을 보고 저를 부끄럽게 한 심수봉의 말에,
순간 저 또한 그녀의 상처보다는 호기심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궁금해 했던 것에
사과를 하고 싶어지더군요. 30주년 기념공연에 기획사가 박근혜를 초청하자고 했다는데,
심수봉은 단호히 거절했다고 합니다.
박근혜를 홍보마케팅으로 이용하는 것같다는 생각으로 말이지요.
정치를 사적으로 이용해서는 안된다는 심수봉의 말이 참 멋지게 와닿더군요.
그런데 기획했던 사람중에 한 사람이 언론에 알려버렸고,
결과적으로 홍보마케팅이 되어 씁쓸한 만원사례가 되었다며,
민망한 미소를 짓기도 했는데요, 심수봉의 대중들에게 던지는 일갈이
부끄럽고 미안하게 하더군요. "왜 사람들은 남의 아픔을 구경하려고 하나?"
혼잣말처럼 뱉었지만, 참 슬프고 미안해지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수봉의 아픔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또 앞으로도 대중들에게는 늘 수식어처럼 따라다닐 듯합니다.
어쩔 수 없이 굴레처럼 짊어져 버린 심수봉의 짐이기도 합니다.
비극의 역사현장에 있었던 비련의 여가수에게 어쩌면 평생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세간의 호기심이겠지요. 그래서 또 미안해 집니다.
개인적으로는 심수봉에게 비련의 여가수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조금이나마 표현을 바꿔서 역사의 비극을 지켜봤던 현대사의 증인이라는 말로,
그녀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더군요.
자신의 아픔과 굴곡진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이,
가수로서의 소명인 것같다고 말하는 심수봉이었지요.
"사람들에게 누구나 상처가 있잖아요.
노래로 그 상처들을 위로하는게 내 소명같아요".
심수봉의 바람대로 그녀의 주옥같은 마법의 사랑노래가 사람들의 마음뿐만 아니라,
그녀의 상처 또한 위로하는 힘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심수봉의 본관은 청송이며 증조부, 조부, 백부, 숙부, 부친, 고모 등이
모두 음악가였던 당대 최고의 음악 명문가에서
1950년 8월 24일(음력 7월 11일)에 태어나(1955년은 호적이 5년 늦게 올라갔다).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여 피아노를 전문적으로 배웠고
재즈 음악을 공부하여 로큰롤을 주로 연주했던 보컬 그룹 논스톱의 드럼 주자로
미8군 부대 전용 클럽 무대에 섰다.
이 때 같은 그룹은 아니었지만 같은 부대에서 함께 활동하던
김수희와 친분을 쌓게 되었다.
워낙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여러 악기를 다루는데 능통하였으며
음악을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참여하여 일당을 받았다.
일용직으로 일하던 심수봉은 1975년에 처음으로 청와대 연회에 초청받아
대통령 박정희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가수 나훈아 앞에서 그의 노래를 멋지게 불러
그녀의 노래에 감탄한 나훈아의 주선으로 1976년 신세기 레코드와 50만원에
음반취입 계약을 맺고 녹음에 들어 갔다.
하지만 음반사와의 분쟁으로 음반발매가 취소되었다.
그후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던
1978년, 대학생의 자격으로 제2회 MBC 대학가요제에 참가한 심수봉은
자신이 직접 작곡과 작사를 한〈그 때 그 사람〉으로 당시 배철수, 노사연,
임백천 등 쟁쟁한 참가자들과 경쟁하였다.
심수봉은 참가했던 가요제에서 입상을 하지는 못했지만,
대학가요제에서 최초로 트로트 장르로 출전한 이색적인 경력으로 대중들에게
주목받았고 자신이 공부했던 재즈 음악이 아닌 트로트로 처음 가요계에 발을 디뎠다.
데뷔와 동시에〈그 때 그 사람〉으로 전국적으로 인기를 얻게 된 심수봉은
데뷔 전 청와대에 초청되었던 인연으로 대통령 박정희는 연회 때마다 심수봉을
초청하여 한동안 청와대 연회가 주무대가 되었다
하지만 1979년에 궁정동 연회장에 초청되어 노래를 부르던 심수봉은
10.26 이라는 역사의 회오리에 휘말렸다.
수사 진행에 참석하면서 무죄로 판결이 났지만 시대적 상황 때문에
방송금지조치를 당하고 정신병원에 끌려가는 등 갖은 핍박을 당해야만 하였다.
가수로 활동할 수 없었던 심수봉은 1980년에는 처음으로 영화《아낌없이 바쳤는데》에
주연으로 캐스팅되었고 영화 주제곡 OST도 직접 불렀다.
심수봉의 복귀작으로 화제의 중심이 된 영화《아낌없이 바쳤는데》는
개봉 이후 관객 5만명을 돌파하는 흥행몰이에 성공했고, 홍콩으로 수출까지 성사되었다.
또한, 1979년에는 드라마《순자의 가을》주제곡 OST〈순자의 가을〉도 직접 불렀다.
〈순자의 가을〉이라는 곡은 처음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1980년 전두환정권이 출범하자, 노래 제목에 영부인의 이름 '순자'가 나온다는 이유로
방송 금지 조치를 당했다.
1983년 후배 가수 방미가 이 노래의 제목을〈올 가을 엔 사랑할거야〉로 변경하고
가사 일부를 수정해 빅히트를 기록한다.
1984년 방송 금지 조치가 해제되자, 그 때의 아쉬움을 달래려
《올 가을엔 사랑할거야》라는 제목으로 다시 음반을 취입하기도 했다.
[2] 1984년에 가수로 복직한 뒤 가정문제로 침체기에 빠졌던 상황에서
작곡, 작사한〈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가 수록된 앨범이 2만 여장이나 팔리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심수봉은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1985년 발표한〈무궁화〉라는 곡도 히트하였지만
가사가 시대적 상황에 국민을 선동하는 뜻이 있다고 여겨져 방송 하루만에
금지 조치를 당했다. 다른 가수들보다 직접적인 정치적 탄압을 많이 받아
가수활동에 지장을 많이 받았던 심수봉은 자신이 경험했던 것들을 음악에 표현하면서
대중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슬프고 애절한 곡들을 많이 불렀다.
그 뒤 1987년에 정통 트로트〈사랑밖엔 난 몰라〉를 발표하였으며
특히 이 곡의 가사가 사랑받고 싶은 여성의 마음을 담은 노래이기도 해서
여성들에게 널리 불렸다.
1997년에는 러시아 민요를 한국어로 번안하고
새로운 멜로디로 편곡한〈백만송이 장미〉가 히트하였다.
지난 2005년, 전국투어콘서트를 진행하던 심수봉은 이혼때문에
자신의 딸과 헤어졌던 사연을 담은〈아이야〉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국민가수라 불리고 있는 심수봉은 자신의 음반을 제작할 때 마다
새로운 노래를 직접 만들어서 수록했었는데 거의 대부분의 히트곡은 심수봉이 작곡하고
작사한 작품이다. 이와 같은 음악적 재능을 겸비한 심수봉은 대한민국 가요계
제 1세대 여성 싱어송라이터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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