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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모니카이야기

[스크랩] 키다리 미스타김 이금희노래/프로필 A

         

 

키다리 미스터 김

           작사 황우루/작곡 횡우루/노래 이금희/발매 콜롬비아레코드사 1965년

 

           키다리 미스터 김은

           싱겁게 키는 크지만 그래도

           미스터 김은 마음씨 그만이에요
           세상에 키 크고 싱겁지 않은 이
           없다고 말을 하지만
           그래도 그이는 그렇지 않아요
           정말로 멋쟁이에요
           건들건들 걸을 때는 매력이 흘러넘쳐요
           키다리 미스터 김에게 나 홀랑 반했어요


           키다리 미스터 김은 언제나 털털이지만
           그래도 미스터 김이 세상에 제일 좋아요
           제 눈에 안경이 이러쿵저러쿵
           말씀을 할진 몰라도
           그이를 안 보곤 그런 말 마세요
           정말로 멋쟁이에요
           싱글벙글 웃을 때는 내 마음 미쳐버려요
           키다리 미스터 김이 없으면 난 못살아요
           없으면 난 못살아요 없으면 난 못살아요

 

 

  

우리가 국민학교 시절 한창 활동했던 이금희씨

자타가 공인하는 국민가수이자

최초 댄스가수 

2007년에 타계했지만

신나는 댄스와 시원한 창법으로

가요계에 일대 혁신을 불러일으켰다.

 

가요계 틀을 깬 트위스트 여걸

 이금희는 1959년 데뷔해 리마 김(金), 로라 성(成), 모니카 유(劉) 등과 함께 미8군 무대와 대학축제, 다운타운의 클럽을 통해 외국 유행음악을 대중들에게 전달해준 여성 팝 메신저였다.

허스키보컬로 화끈한 율동을 곁들여 들려준 그녀의 흥겨운 곡들은 부동자세로 노래하던 정적인 가요계에 지각변동을 몰고 왔다. 이금희는 ‘미스 다이나마이트’로 불리며 댄스여왕으로 군림했던 최초의 댄스가수였다.  

대표 곡 ‘키다리 미스터 김’은 온 나라에 트위스트열풍을 몰고 오며 전쟁의 포화를 딛고 일어서려는 국민들에게 큰 용기와 즐거움을 선사했고 지금도 국민가요 급 노래로 올드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본명이 이대금인 이금희는 독립운동가 할아버지 때문에 1940년 9월15일 평북 선천에서 목회생활과 개인사업을 했던 부친 이득성과 모친 임순도의 3남3녀 중 다섯째로 중국 상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울음보가 한번 터지면 동네가 떠나갈 듯 울었을 만큼 풍부한 성량을 타고났었다.

 

해방이 되자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해 남산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통역원으로 일했던 큰오빠 이대삼이 주둔해 있던 대전을 거쳐서 부산에 정착했을 만큼 그녀의 어린 시절은 시대의 아픔과 궤를 함께 한 유랑의 세월이었다. 부산성지초등학교 4학년에 월반을 한 그녀는 공부, 운동, 음악, 무용 등 다방면에 재능을 보여 ‘서울내기 다마내기’로 불렸다. 동네에서도 골목대장으로 군림하며 여장부로 통했다.

 

그러나 그녀의 화려했던 가요계 활동의 이면엔 좌절의 아픔이 숨어있다. 사실 그녀는 경남여중 2학년 때부터 당시 음악선생이었던 오현명의 레슨을 받으며 성악가의 꿈을 키우던 클래식학도였다. 하지만 경남여고 시절 학생회 대대장과 합창부장을 했던 적극적인 성격은 고3 때 부친의 위암 수술로 가세가 기울어져 꿈을 키워오던 서울음대 진학을 포기하는 좌절을 겪었다.

 

이때부터 청소시간에 팝송을 부르며 춤을 추고 학교행사에서도 가곡을 부르지 않고 팝송만을 부르는 반항적 행동을 보였다. 꿈 많고 쾌활했던 이금희는 수면제를 사 모으며 자살할 기회를 엿볼 만큼 상심했다.

 

좌절의 세월 중 마음을 달랠겸 부산에 내려온 박단마 ‘그랜드 쇼’를 친구와 몰래 구경 같다가 현인, 남인수, 곽순옥, 백일희등 당대 스타가수들의 멋들어진 노래에 매료되며 인생이 뒤바뀌었다.

 

 

“특히 현인의 노래가 너무 좋았다. 대학은 못 가도 이런 노래를 할 수 있다는 희망이 들면서 가수가 되려 했다”고 이금희는 털어놓는다. 부친의 반대는 대단했지만 어머니와 큰오빠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큰오빠의 친구인 인기가수 송민도가 부산에 내려오자 아버지 몰래 보따리를 싸들고 무작정 상경했다. 송민도의 소개로 KBS방송악단장인 그의 동생 송민영을 찾아갔다. 즉석 노래 데스트에서 팝송가사를 시원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그녀에게 반해버린 송민영은 3일 후 KBS 라디오 송영수PD가 담당하던 쇼프로그램에 출연을 주선했다.

 

겁도 없이 손시향, 곽순옥, 이종순 등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들 틈에 끼어 팝송 번안 곡 ‘동창이 밝았네(It's almost tomorrow)’ 부르며 엉겁결에 가수데뷔를 했다. 그녀는 첫 출연금을 봉투 째로 어머니에게 드리는 효심을 보였다.

 

시원한 창법으로 노래하는 신인가수 이금희는 미8군 무대에서 유명했던 베니 김(본명 김영순)의 눈에 들었다. 1963년 말 그의 주선으로 미8군 쇼 전문 ‘화양’ 엔터테인먼트의 오디션을 통과해 ‘뉴스타 쇼’에 출연하며 미 8군 가수로 거듭났다.

 

당시는 번안가요 전성시대였다. 이금희도 폴 앵커와 엘비스 프레슬리의 곡들과 ‘싱싱싱’, ‘바나나 버트송’, ‘비빠빠 룰라’ 등 외국 번안 곡을 불러 인기를 끌었다.

 

이금희는 “당시 미8군 여가수들의 경쟁은 치열했다. 나도 큰 거울을 놓고 연습을 하고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마르는 약을 많이 먹어 노래하다 쓰러지기도 했다”며 “많으면 10여 곡 이상의 앵콜을 요청 받아 열정적으로 춤을 추고 노래해 목이 쉬고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을 이뤄 무대화장 속 눈썹이 얼굴 사방에 흩어지기가 일쑤였다”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한다.

 

또한 미8군 가수였던 막내 동생 이금미(본명 이대란)'이씨스터즈'를 결성, TV방송에도 출연해 주목을 받았다. 1965년에는 이미자, 위키리 등과 함께 월남비둘기부대 위문공연을 떠나 말라리아에 걸리는 악전고투 속에서도 파병군인들을 열광시켰다.

 

월남군인과 트위스트를 추는 파격적인 사진이 외신을 타고 타전되기도 했다. 당시 정상급 가수 최희준은 “이금희 월급 반만 주면 다시 8군무대로 가겠다”고 했을 정도로 그녀는 미8군 무대 최정상의 스페셜A급 가수로 도약했다. 그녀는 당시 ‘스프링 버라이어티’ 등 유명 쇼로부터 월 40회이상 공연부킹을 받아 신중현과 무대를 함께 꾸미기도 했다.

  댄스열풍 몰고 온 히트제조기

    이금희의 데뷔 이전인 1950년대 말 미8군 무대에는 미스K, 먼로K라는 걸출한 한국여성댄스가수가 있었다. 그녀들은 무대 위에 드러누워 춤을 추고 노래하는 파격적인 무대매너로 미군들의 넋을 빼놓은 걸출한 댄스가수들이었지만 미군 장교들과 결혼 후 은퇴를 해버려 일반대중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이금희는 “이들의 활약을 전해 들었을 뿐 직접 보지는 못했다”며 “노래가 흥에 겨우면 자연스럽게 가사에 맞게 움직이고 춤을 췄을 뿐 그들의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시공관’은 일반데뷔 무대였다. 절친했던 미8군 동료가수 이춘희와 함께 드레스도 없이 평상복 차림으로 나애심, 박재란 등 일반무대의 최고 가수들과 함께 출연한 무대에서 폴 앵카의 ‘다이아나’와 베니 김의 부인 이해연의 히트곡 ‘추억의 이스탄불’을 열정적인 춤과 함께 불렀다. 첫 무대부터 앵콜 요청을 받을 만큼 대중들은 이금희의 폭발적인 무대를 좋아했다.

 

이후 ‘이금희가 팝송을 부르면 바로 히트한다’는 말이 돌 정도로 가요계의 핵 폭탄으로 떠오른 그녀에게 시샘의 눈길이 쏠리며 클래식 창법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비난을 극복하기 위해 목청을 혹사하며 피나는 노래연습을 하면서 허스키 보컬이 됐다.

  이후 송민영의 소개로 김광수 악단의 전속가수가 된 그녀는 동화백화점(현 신세계) 음악감상실과 미도파 백화점 옥상의 ‘21 클럽’, 고미파(화재 이전의 무학성),유엔센터 등 당시 최고인기 무대들을 주무대로 활약했다.

 

  161cm에 50kg대의 터질듯한 몸매에 화끈한 춤을 곁들여 노래하는 이금희는 뭇 남성들의 야릇한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무대마다 앙코르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당시 수입도 대단했지만 옷 욕심이 많아 의상비로 다 섰다”고 회고했다.

  대중들의 주목을 받자 박춘석을 비롯한 많은 작곡가들로부터 음반취입 제의가 몰려들어왔다. 이금희는 “어느 날 안경을 쓴 사람(황우루)이 단조롭게 느껴지는 가요를 취입하자며 찾아왔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거절했어요. 한달 간 지겹게 따라 다니며 졸라서 목소리 상태가 최악일 때 취입을 했는데 그게 ‘키다리 미스터 김’이에요. 내 대표 곡이 될 줄 누가 알았어요”라고 당시를 회상하며 웃음을 머금는다.

  1966년 당시 황우루는 진짜 180cm가 넘는 30여명의 키다리들을 모아 국내 최초의 팬클럽을 결성하기도 했다.

  키다리 미스터 김이 1년 동안 방송금지라는 아픔을 겪었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당시 박대통령이 키가 작기 때문에 제 노래를 못 부르게 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고 이금희는 조심스레 입을 연다.

  이금희는 데뷔음반 발표 후 ‘용꿈’, ‘그것참 별꼴이야’, ‘나는 말괄량이‘, ‘치맛바람’, ‘두 줄기 길’ 등 히트 퍼레이드를 벌이며 정상의 인기가수로 군림했다. 1966년에는 이미자, 유주용 등과 함께 월남 비둘기부대 위문공연을 떠나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1968년엔 동경에서 개최된 한일친선일본공연에 참가하러 출국하려다 격렬한 반일 시위를 경험한 이금희는 “일본에서 우리가수가 노래할 때 마이크 음량을 줄이는 등 훼방을 해 국력을 키워야 한다는 애국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1965년 결혼 후 이금희는 두 번씩이나 임신 5, 6개월만에 유산을 하는 아픔을 겪었다. 심한 충격을 받은 그는 셋째 윤정을 임신한뒤 1969년 MBC TV 개국 쇼 출연을 마지막으로 모든 출연교섭을 마다하며 슬그머니 가요계에서 모습을 감췄다. 출산 후에도 연예활동보다는 딸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며 펑범한 어머니의 길을 고집했다.

  다만 최희준, 위키리, 한명숙, 현미 등 인기가수들의 친목모임인 ‘60회’와 ‘매미회’에는 참석해 가수들과의 친분을 유지했다. 딸의 학교 모임에만 전념한 채 애완 동물을 기르며 소일하던 이금희는 1977년 이혼의 아픔을 겪었다.

  이후 1984년 호텔디너쇼에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다 1987년 7월 KBS TV ‘가요무대’로 컴백했다. 이후 TV, 라디오 프로 출연과 수 차례 해외교포 위문공연으로 동포들의 망향의 슬픔을 달래주었다.

 

결혼 후 늘어난 몸무게를 줄이며 강한 재기의욕을 보인 그녀는 1998년 신곡과 리메이크 곡을 담은 CD를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정동극장에서 한명숙, 최양숙, 권혜경 등 왕년의 인기가수들과 함께 이틀간 공연을 하면서 “젊은 팬들의 사인요구에 가슴이 뭉클했다. 팬들에게 너무 소홀했다는 아쉬움을 가졌다”고 고백했다.

 

화끈한 율동의 댄스곡들로 1960대를 흥겨운 춤바람 열풍지대로 몰아 넣었던 한국최초의 댄스가수 이금희.

그녀는 김추자, 김완선, 김현정 등 후배댄스가수들의 탄생에 자양분을 제공한 선구자였다  (퍼온글)

출처 : 하모사랑 - 하모니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글쓴이 : 삐삐아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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